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바리스트 갈루아 (문단 편집) === 첫 번째 불운: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입시 실패 === 부르라렌의 시장이었던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부친의 영향을 받아 갈루아 역시 혁명가를 꿈꾸었다. 그래서 갈루아는 당시 젊은 혁명가들이 모이는 곳이자 유럽의 학술적 업적이 탄생하는 중심지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낙방하였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재수(입시)|재수]]까지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갈루아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시기 갈루아는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왕립과학원)의 교수로 재직하던 [[오귀스탱루이 코시]]에게 직접 자신의 발견을 적은 소포를 보냈다. 소포 안에는 5차 방정식의 대수적인 해법이 없음을 증명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코시는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17살에 불과한 소년 갈루아가 당대 최고의 수학자인 코시를 놀라게 한 것이다. 그러나 갈루아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입학하지 못했다. 갈루아가 입학시험을 준비하던 중, 공화주의자였던 아버지가 정치적 음모에 희생[* 아버지가 취미로 풍자시를 짓고는 했는데, 가톨릭 신부가 지역의 명사를 저질적으로 음해하는 풍자시를 갈루아 아버지의 이름으로 작성해서 발표해버렸다.]당해서 목을 매어 자살해 버린 것이다.[* 갈루아의 아버지를 자살하게 한 장본인인 [[예수회]] [[가톨릭]] 신부는 이후 뻔뻔하게 갈루아의 아버지 장례를 진행했다가, 그 위선에 분노한 시민들에게 욕설과 함께 돌 세례를 맞고 허겁지겁 달아났다.] 이 사건으로 소년 갈루아의 삶의 토대는 산산이 부서졌고, 위대한 수학적 발견을 해서 행복하던 시간은 가장 괴로운 시간으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갈루아는 급진 공화주의자가 된다.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던 갈루아는 두 번째 입학시험에서 면접관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심지어 그들에게 네가 하는 설명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만 듣자 칠판지우개를 던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우개가 면접관의 이마에 제대로 명중했다.[* 여기에 관해서 실은 칠판지우개 투척 사건은 없었고 후대의 전기 작가의 창작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면접 당시 갈루아는 자신의 증명을 설명하면서 온갖 계산 과정을 건너뛰어 버렸다. 당시 시험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보고서에 칠판지우개 투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갈루아는 구술 면접에서 "그것은 자명하다"만 반복하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는 표정만 지으면서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그것은 자명하다"라는 말을 반복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너무 자명했기 때문에(trivial)"를 오역한 것이 아닌지.] 생전 갈루아가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귀찮은 부연설명은 다 건너뛰는 습관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한 좀 알기 쉽게 설명해달라는 요구를 하자 면접관들을 자신의 뛰어난 의도를 모르는 무식쟁이라고 경멸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갈루아는 당연하게도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떨어졌다. 사실 갈루아는 수학 이외의 성적이 낙제거나 평범해서 설령 공손하게 면접을 치렀더라도 낙방했을 것이다. 실제로 갈루아의 에콜 폴리테크니크 낙방의 공식적인 사유는 수학 이외의 성적 미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